소개와 방침


1. 이 블로그는 대중문화 가운데 제가 관심있는 것들과 공화정기 로마사를 위주로 한 서양 고대사를 다루는 곳입니다.
2. 트랙백, 링크와 펌, 덧글에 대한 방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당 글로)
3. 이 블로그에 쓰는 글에서는 가급적 정치색을 제거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4. 이 포스팅은 방명록을 겸합니다.
5. 이 블로그에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附: 제우스 신조차 두렵게 만드는 필리포스 : 메세네 사람 알카이오스의 "필리포스 찬양시" 문제. 달려라 공화국






"메세네 사람 알카이오스"는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활동한 시인으로, 당대에는 상당히 유명한 문학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정치적인 테마를 다룬 것이 많은데, 특히 Anth.Pal.9.518은 필리포스 5세의 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에 대한 동시대의 반응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Anth.Pal.9.518의 내용은 다음처럼 파악될 수 있다.


제우스여! 올륌포스의 방벽을 높이시라 -필리포스는 못 올라갈 게 없으니.
신성한 청동 성문을 닫아 잠그시길. 대지와 바다가 필리포스의 홀 아래 굴복하고, 남은 거라곤 올륌포스로 통하는 길 뿐이라네.




대지와 바다의 굴복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아마도 마케도니아 세력이 에게해에서 강성하던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을 것이다. 즉, 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 중의 어느 시점이다.(cf> DeSanctis iv-1 p9, Walbank CQ36) 시에 내포된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문제는 대체 이 작품이 필리포스에게 바치는 찬사인가, 혹은 비아냥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cf> Edson CP43) 문면에서 시인은 명백하게, 필리포스가 제우스 신을 쳐부수고 성스러운 올륌포스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찬사라고 여기기에는 정도가 지나치다. 이런 식의 찬사는 헬레니즘기의 문학에서 유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Anth.Pal.9.518에 사용된 표현은 여러가지로 Anth.Pal.16.6과 유사성을 띤다. 문제의 두번째 시는 작자 미상으로, 아마도 기원전 3세기 말(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 중?)에 마케도니아 왕실이 헤카테 신전에 트라키아 원정 중 노획한 재물 일부를 봉납하며 첨부한 헌사였을 것이다.(cf> Walbank CQ36) 여기에서 필리포스는 "유럽의 지배자"이자 "제우스 신이 불멸자들을 지배하듯, 대지와 바다에 걸쳐 군림하는 필멸자들의 왕"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충분히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과장된 찬미이다. 그러나 Anth.Pal.9.518의 클레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유의된다.


또한 올륌포스 공격이라는 독신(瀆神)적인 소재는 신화 속의 유명한 정복 영웅들이 아니라 알로아다이 형제를 연상시키는 까닭에, 모티프가 필리포스에게 호의적이라고 여기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Anth.Pal.9.518은 마치 찬양시같은 표현을 군데군데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사용해서 전혀 이치에 닿지 않게 과도한 내용을 엮어내어, 결과적으로는 필리포스를 야유한 시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알카이오스는 Anth.Pal.16.6과 같은 당대의 실제 찬양을 패러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해석이 옳다면, 알카이오스 시인은 필리포스 5세의 에게해-마케도니아 전쟁에 몹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같은 태도가 꼭 전쟁중 마케도니아군의 부도덕한 행위나, "왕들의 밀약" 의혹 등으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판단할 만한 증거는 없다. 메세니아는 기원전 214-213(?)년에 마케도니아로부터 공격을 당했고, 그 이래 외교적으로 반(反) 마케도니아 노선에 서는 모습이 보인다.(cf> Walbank P p78, Luraghi p260-261) 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이 벌어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시인이 필리포스를 국적으로 여겨 증오했을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한편 알카이오스의 Anth.Pal.9.518는 필리포스의 비상한 "야심"을 전해주는 동시대인의 목소리로 간주되기도 한다.(cf> Walbank2002 p128, Eckstein p81-82) 분명 그럴 수도 있다. 특히 알로아다이 형제 신화를 암시하는 분위기로 볼 때, 필리포스도 그 무모한 형제들처럼 망상적인 야욕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것 같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비유의 형태로 암시된 것일 따름이다. 아울러 다소 냉담하게 보자면 증오나 경멸을 나타내는 문장에는 못 넣을 말이 없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알카이오스가 특별히 객관적인 자세를 지녔던 인물이라고 판단할만한 근거 자료가 주어져 있지 않다. 앞의 해석처럼 Anth.Pal.9.518를 비아냥으로 보는 한, 그 모티프나 비유로 사용된 소재 하나 하나에까지 모두 알카이오스의 정직한 견해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구한 자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에 부쳐 발표된 알카이오스의 시가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은 Plut:Flam.9.1-4.

**Walbank 선생은 이 문제로 크게 두 차례에 걸쳐 견해를 바꾸었다. 이것은 Anth.Pal.9.518 해석에 얽힌 난해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만 하다. 1940년의 명저 『Philip V of Macedon』에서 선생은 해당 작품이 빈정거리는 어조를 띤다고 보았다. 그러나 1942년에 Classical Quarterly 36호에 게재한 논문에서는 A. Momigliano와 그의 논문(JRS32)의 영향을 언급하며 Anth.Pal.9.518가 실제로 찬양시라는 견해를 택했다. 이는 1948년에 C. Edson의 반박으로 이어졌고, 나중에 Walbank는 Edson의 설득력을 인정하여 문제의 작품이 반어적이라는 최초의 해석으로 돌아가게 된다.(Walbank2002 p128)

Momigliano가 Anth.Pal.9.518를 찬양시로 본 배경은, 내용상 Anth.Pal.9.518를 대체로 모방하되 "필리포스"를 로마 제국으로 대체한 것으로 생각되는 뮈틸레네 사람 알페이오스의 시(Anth.Pal.9.526)의 경우 그다지 이면의 의미를 따질 것 없이 로마를 찬양한 글이었다고 생각한 데 있다. 그러나 알페이오스 시의 의미 자체는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 해도, 그 시의 작성 연대는 대략 아우구스투스의 집권기로, 알카이오스의 시대보다 거의 두 세기가 늦다. Edson은 알페이오스가 모방 대상이 원래 지니고 있던 맥락을 놓쳤을 수가 있다는 중요한 관측을 제시했다. 한편 "대지와 바다"의 지배라는 문구가 반드시 그에 어느 정도 어울릴만한 상태에 수반하여 쓰일 필요는 없다는 Momigliano의 견해에 대한 Walbank의 반박은 CQ36에 포함되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알카이오스의 다른 작품들 안에는 필리포스를 악인으로 묘사하거나, 그 적들을 찬미하는 시는 몇 가지 있지만,(Anth.Pal.9.519, 16.5, Plut:Flam.9.2~Anth.Pal.7.247) 반대 뉘앙스를 보이는 것은 없다. 개인의 정치적인 입장은 물론 변하기도 하므로, 이는 문제의 작품 자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상에 비해 우월한 증거는 아니다.





F. W. Walbank, 「Alcaeus of Messene, Philip V, and Rome」, CQ36 (1942).
                      『Polybius, Rome and the Hellenistic World』(2002).
A. Momigliano, 「'Terra Marique'」, JRS32 (1942).
C. Edson, 「Philip V and Alcaeus of Messene」, CP43 (1948).
N. Luraghi, 『The Ancient Messenians』(2008).





附: 기원전 3세기 말 카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령. 달려라 공화국










기원전 3세기 말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에서 카리아 영토는 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 및 그 전후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점들을 띠고 있다. 당시 이 구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령(혹은, 각 도시들의 입장에서 선호한 것으로 보이는 표현으로는 "동맹")이었음이 사료에서 직접 확인되는 지역은 사실 카우노스, 뮌도스, 할리카르낫소스 뿐이다. 이 외에도 정황상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나하고 의심되는 곳은 다수가 있으나, 모두 증거가 어렴풋하고 단순치 않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역적으로 넓고 연루되는 이슈가 많은, 아뮈존에서 바르귈리아에 이르는 지역의 귀속 문제를 따로 떼어 살펴보려고 한다.(*)



전세 문헌 자료 속에는 기원전 3세기 말 해당 지역의 세력 구도가 어떠했는지 직접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기원전 198년 가을의 니카이아 평화회담에서 나온 참석자들의 발언(Polyb.18.1.12-2.4) 가운데 그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 같은 부분은 있다. 여기에서, 필리포스에게 제출된 연합측의 영토 조정안으로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빼앗은 도시들"에 대한 복구 요구는 플라미니누스가 제시했고, 그보다 나중에 발언 차례를 가진 로도스 제독 아케심브로토스는 이아소스, 바르귈리아, 에우로모스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빼앗은 도시들"이 에게해 일대의 舊 프톨레마이오스령과 동일하고 연합군 대표단의 요구 내역에 중복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세 도시는 에게해-프로폰티스 전쟁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소속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옛 바르귈리아 인근에서 발견된 이른바 "3왕 명문"에는 "안티오코스 왕이 지금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전쟁을 했을 때 그 병사들이 토다사와 킬다라를 점령했는데, 그보다 이전에 필리포스 왕은 테안겔라를 안티오코스 왕에게 넘겼고..." 라는 대목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수수께끼가 많은 정보이지만, 토다사와 킬다라가 문제의 "전쟁"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배후에 인접한 두 도시를 프톨레마이오스령으로 만든 압력이 주요 항구 도시인 바르귈리아를 빗겨갔으리라 상상하기는 다소 어렵다.


또 다른 금석문으로, 옛 아뮈존 지역에서 발견된 CIG2899는 아마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아시아 대총독 제욱시스의 선언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시절?)"를 언급하며 아뮈존 시민들에게 보호를 약속하는 대목이 있다. 필시 이 선언은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아뮈존 점령에 따른 사후 조치 가운데 하나로 나온 것이다. 점령 시점은 아마 금석문상에 기입된 시기인 기원전 203년 5월([건국력]"109년 다이시오스 달 15일")로부터 멀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된 "프톨레마이오스"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조정의 왕이라면, 하필 그를 거론했다는 사실은 아뮈존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점령 직전에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아뮈존의 상황은 한편 기원전 220년대를 전후한 시기 카리아의 정치 지형과 연관지어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 무렵 카리아에는 알린다에 기반을 둔 세력가 올륌피코스(Polyb.5.90.1)의 소규모 군주국이 존재했다. 올림퓌코스는 대략 기원전 220년대 초엽에 안티고노스 왕조의 신하가 되었는데, 기원전 210년대 즈음에 그의 소군주국에는 정황상 페다사, 에우로모스, 라브라운다, 그리고 아뮈존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세력 범위와 기원전 203년 봄의 직전 즈음에 아뮈존이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음을 동시에 인정한다면 후자의 상태는 필시 기원전 210년대 후반과 기원전 200년대 중반의 사이 어느 때엔가 올륌피코스의 소군주국에 찾아온 변화로 인해 조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소군주국은 상전을 바꾸었을 수도 있고,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군에 의해 토벌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와는 별개의 이유로 나라가 붕괴된 것일지도 모른다. 셋 중 어느 쪽을 택하건, 그 변화의 성격상 아뮈존과 비슷한 시기 올륌피코스 군주국에 속해 있었다고 여겨지는 다른 도시들의 프톨레마이오스령 몰입을 충분히 상정해 볼만 하다.



집합적으로, 니카이아에서 보인 힌트와는 달리 금석문 자료들은 아뮈존-바르귈리아 구역 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령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것은 자료 사이의 모순인가? 사실 그렇지는 않다. 첫째로, 니카이아의 힌트는 플라미니누스가 거론한 舊프툴레마이오스령이 잘 정의되고, 또 연합군 대표단의 요구 사항에 중복이 없었다는 가정이 옳아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모두 의심스럽다. 플라미니누스가 사용했던 표현들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빼앗은 도시들"을 돌려주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시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법리상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에 봉사하는 괴뢰정권이 통치하던 도시가 있었다면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시인가, 아닌가? 플라미니누스가 이와 함께 내놓은 다른 발언에도 역시 다분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 로마인은 마케도니아 왕국이 "모든 헬라스 땅"으로부터 물러나야 한다고도 했으나, 여기에서 "헬라스 땅"은 확실한 정의를 지니는 지리 개념이 아니었고, 그 본인은 이 표현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상술할 기회를 뚜렷이 회피해 버렸다. 다소 지나친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 그 "헬라스 땅"에 아시아 서안이 포함될 수 없다고 믿어야 할 이유조차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우리는 금석문의 해석을 확정지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다. 예컨대 CIG2899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반드시 왕명이었어야 할 까닭은 없다. 혹시 아뮈존을 지배했던 또다른 토착 세력가의 이름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더라 해도, 엄밀히 따졌을 때 아뮈존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점령 "직전"에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령이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아뮈존의 귀속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논의를 상당히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사실이다. (cf> Ma, Derow & Meadows)

또한 "3왕 명문"이 끊어낸 시간표 속에서 토다사와 킬다라는 실제로 한때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 상태의 개시 시점은 명문 내용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필리포스 왕이 테안겔라를 안티오코스 왕에게 넘긴" 일보다 올라갈 것 같기는 하지만 이것도 꼭 분명하지는 않고, 테안겔라 양도 자체는 기원전 201년 여름부터 기원전 196년 여름 사이 어느 때에라도 발생할 수는 있는 일이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말 카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세력의 실태는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가 지나치게 단편적인 탓에 여전히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본 시리즈에 포함된 지도는 프톨레마이오스령을 최대한 늘려잡는 방향으로 작성되었으나 이것은 다분히 금석문 자료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를 둔 것으로, 역사적 진상과는 많은 차이가 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더 많은 정보가 향후 드러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이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곳으로는 라트모스 기슭의 헤라클레이아, 밀레토스, 크니도스 등이 있다. 코스 섬과 칼륌나 섬은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최소한 "유착"되었던 정황이 존재한다. cf> Eckstein.

**토다사는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 킬다라 근처의 작은 도시였을 것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아뮈존 점령과 연관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전세문헌 기록으로 Polyb.15.25.13이 있다. 여기에 설명된 필로파토르 사후 알렉산드리아 조정으로부터 필리포스에게 파견된 사신의 임무 가운데는 "안티오코스가 (평화)조약을 완전히 어겼을 경우를 대비하여" 협조를 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완전히 어길 경우"를 대비한다는 말은, 이미 어느 정도는 어겼다는 의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단어의 뉘앙스가 주는 느낌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사실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cf> Walbank ii.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