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1일
공갈기동대
국내 시청자 가운데 상당수가 그랬겠지만 나는 [공각기동대] 를 극장판으로 가장 먼저 접했다. 왜 이게 훌륭하다고들 하는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만화를 보았는데, 읽는 도중에 '굉장히 재미있다' 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우키 마사미의 [패트레이버] 코믹스판도 보게 되었다. 대원에서 나온건 아니었는데, 정발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나는 당시까지 이 만화가 진작 국내에 출판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하필 이 때 보게 된 배경에는 때마침 내가 품고 있던 거대하고도 하찮은 야심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해 겨울에 우리집은 이사를 했는데, 나는 이대로 고분고분하게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동네 일원에서 가장 큰 만화 대여점에 진을 치고서 모든 서가에 꽂힌 만화를 다 보겠다는 큰 야심을 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큰 대여점 방문+구석에 처박힌 만화까지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겹쳐서 이 [패트레이버] 코믹스판에 손이 닿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 계획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끝내 독파한 것은 공작왕, 돌격 빳빠라대 같은 막장 만화들 뿐이었다.)
아무튼 이미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TV판에서 미루어 짐작하기는 했지만 [패트레이버] 의 코믹스판 역시 매우 재미있었다. 문제의 [패트레이버] 두번째 극장판과 딴판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저런 사례들을 접한 끝에 나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라는 사람은, 매력적인 설정과 흥미있는 캐릭터 라인을 가지고서도 대단히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특출난 자질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자본주의 소비 체제의 노예들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이리라. 이런 무리들이야 그저 슬레이어즈 마법 주문 외우다가 데지코님께 공물이나 바치고 네무의 가슴 이라고 혼잣말 하면서 킥킥 웃고 난 다음에 일본 단체 여행갔을때 혼자 숙소에서 빠져나와 토라노아나에 가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백지 위에 점을 잔뜩 찍어놓고서 "예술적이지?" 라고 물었을 때 내가 "아니" 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내게 무슨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순히 나의 쁘띠브루주아적인 감성은 신고전주의 미술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별다른 논쟁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일본 5대 애니메이션 감독" 이 찍어낸 작품들이라는 것이, 고삐리 시절 교지에 실리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글들과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
극장판을 먼저 보게 되는 만화얘기를 하니 생각났는데, 국내에서는(아마 현재는 일본에서도...) 마크로스도 그런 부류가 아닌가 싶다. 처음 봤을 때는 민메이가 히카루와, 이름들 가운데 X 가 들어가는 관계가 되지 못한 이유를 작품 내적으로 드러나는 성격차에서밖에 찾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지극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민메이는 히카루와 이어지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모든 십덕후들의 민메이쨩이 된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자기 완결적인 예술로 보았다면 어찌 이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 by | 2007/12/11 02:17 | 타락한 유희의 場 | 트랙백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예전에 투니버스에서 계획한 다큐멘터리가 기억나는군요;ㅁ;
오시이 마모루,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안노 히데야키까진 기억나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