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이 글이 비록 "에우메네스 충신설" 에 대해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쓰여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에우메네스는 사실 충신이 아니었다(!)" 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며, "충신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사료라는 것도 인생만큼이나 복잡한 것이므로, 그 안에서 한 길로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길을 잃고 헤매어 보는 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이 남루한 자리에서나마 한 번 펼쳐보려는 것입니다.
※"에우메네스 충신설" 이라는 것은 제가 편의상 붙인 이름으로, 제일차적으로는 에우메네스가 마케도니아, 혹은 그 왕조에 충성(loyalty)을 지켰다고 보는 관점을 뜻합니다. 본문 중간에 인용된 위키백과와 네이버백과의 글을 종합하면, 이 관점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대략 망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날이면 날마다 하는 인물 평론이 아닙니다. 내 말 한 번 믿어 보시라니까요."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기관이었던 인물.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이 두명의 걸출한 마케도니아 군주를 20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대왕 사후의 혼란기에는 왕실의 편에 서서 제국의 분할과 권력 찬탈을 꾀하던 무장들, 특히 안티고노스와 대적했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유명한 만화『히스토리에』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최근 급격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인물의 일생은 이미 다양한 웹문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또 길게 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네이버 백과 "에우메네스"
위키 백과 "에우메네스"
http://redoctobor.egloos.com/4374899
http://yuratz.egloos.com/2338976
http://yuratz.egloos.com/2340608
http://yuratz.egloos.com/2341928)
대신에 이 글에서 살펴보려 하는 바는, 다수의 글을 통해 에우메네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는, 일종의 "에우메네스 충신설" 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접근성이 높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이미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전기를 인용하며 다분히 그런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 위키 백과의 평가 부분도 그의 충성과 노력, 그리고 비극성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뛰어난 역량을 지닌 장군이었으나,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충심으로 똘똘뭉친 군대를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단 하나의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그의 노력은 단지 그가 출신이 마케도니아인이 아니며, 장군이 아닌 문관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경멸하던 장군들과 샤트라프(지방의 태수)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에우메네스는 옳은 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무자비한 적과 자신의 군인에 의한 배신에 압도당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아마도 근래 많은 분들이 찾아보셨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에우메네스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플루타르코스의『영웅전』에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사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같은 사람이 제시한 "에우메네스 충신설" 과는 상당히 다르다. 플루타르코스의 관련 견해가 요약되어 있는 <에우메네스와 세르토리우스의 비교> 에서 에우메네스에 대한 평가 부분을 살펴보면, 위에 나온 관점들과는 상이한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경쟁에서 손을 뗐더라면 에우메네스는 명예를 누리며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테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최고 지도자들과의 위험한 항쟁을 기어이 고집했다.
(2) 만약 에우메네스가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었다면, 그와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 안티고노스는 그를 잘 대접하고, 중용했을 것이다.
(3) 에우메네스는 지휘를 하고 싶은 욕망때문에, 자의로 전쟁을 했다.
(4) 에우메네스는 실로 전쟁의 애호가였다. 그는 일신의 안전보다도, 자신의 탐욕스러운 야망쪽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이런 평가가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즉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에우메네스가 디아도코이 전쟁때 싸운 것은 기본적으로 권세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딱히 충성심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같은 인물의 같은 일생을 이야기 하면서도 평가는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사물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같은 사실이라도 관점을 달리하면 상이한 평가가 나오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우메네스 충신설도 이처럼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그 경위를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일단 플루타르코스가 그리고 있는 에우메네스 상(像) 자체가 위키 글에서 묘사된,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같은 존재와는 크게 다르다. 『영웅전』에서 소개되는 에우메네스는 약삭빠르고 일견 기회주의적이며, 책략에도 능한 인물이다.
고전적인 픽션의 주인공으로는 전자의 에우메네스상(像)이 더 적합하겠지만, 그가 '난세에 활약한 재능있는 정치가겸 무장' 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플루타르코스의 묘사에는 딱 잘라 부인하기 힘든 현실성이 생긴다.
예를 들어 『영웅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 몇 가지를 요약해서 살펴보자.
1. 원정 중에 알렉산드로스가 자금이 부족해져서 측근들로부터 상납금을 거둔 일이 있었다. 이 때 에우메네스는 300 탈렌트를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작 가져온 것은 100 탈렌트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에우메네스는, 이것 조차도 겨우 겨우 모은 돈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의심한 알렉산드로스는 은밀히 부하를 시켜 에우메네스의 군막을 불태우게 했다. 불 타고 남은 자리에서는, 1천 탈렌트가 넘는 금과 은이 녹은 채로 발견되었다.
2.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총신인 헤파이스티온(*알렉산드로스와 불꽃관계였다는 소문이 있는 인물)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 번은 둘은 어떤 문제때문에 서로 욕설을 퍼부어가며 싸웠다. 그런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헤파이스티온이 죽어버리자, 에우메네스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고인에게 명예를 바치는가 하면, 그 무덤을 꾸미는데 거액을 쾌척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친구의 죽음때문에 비탄에 잠긴 나머지, 그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일 저런 일들이 실제로도 계속 일어났다면, 사람들은 에우메네스가 "겉과 속이 다른 인물" 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플루타르코스도 자신이 수집한 예화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에우메네스 관(觀)을 수립했을 것이다. 예화들 자체는 서로 독립된 것이라 해도, 일단 "겉과 속이 다른 인물" 이라는 인상이 정착되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하는 행동에 전부 무슨 숨은 의도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게 된다.
에우메네스 충신설이 왜 나왔는가? 그야 후세 역사가들 가운데 그렇게 평가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에우메네스가 어쩐지 충신같아 보이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평가 부분을 전재해 보기로 하겠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에도 늘 왕의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고 어전회의(御前会議)의 형식으로 군사 회의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아르가이 왕조를 지지하며 왕국의 통일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로마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코르네리우스(Cornelius Nepos, BC 100?~BC 25?)는 에우메네스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의 '최후의 수호자'라고 평하며,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장군들이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과연 여기서 말하는대로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다른 무장들이 왕실을 사실상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와중에, 왕가의 편이 되어 싸울 군대를 조직해서 안티고노스같은 강력한 디아도코이들과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사람의 행동이 항상 그 본심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충성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르다" 는 의심을 가지고 보면 이 역시 자신의 다른 야심을 감추고 한 행동이 아닌가 하고 석연찮게 여길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똑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충의의 발로로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계산된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에우메네스는 단지 자신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 일단 정통성 있는 편에 섰던 것은 아닐까?

"하하하, 전 단지 한 황실을 위해 일했던 것 뿐입니다."

"저는 천황님의 충실한 신하죠.♡"
그런데 이런 의심을 개인적으로 늘어놓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단지 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가 어느새 역사의 진실로 둔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어서 다음에는, 에우메네스 관련 주요 사료들의 성격을 살펴봄으로서 충신설과 비(非)충신설이 대략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덧글
슈타인호프 2009/07/04 15:40 # 답글
오오!! 다음편을 눈 크게 뜨고 기다리겠습니다!!^^
Shaw 2009/07/05 03:27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無上之道 2009/07/04 16:32 # 답글
아래에 계신 두분의 웃음이 참으로 해맑군요.
Shaw 2009/07/05 03:27 #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스페르츠 2009/07/04 20:12 # 답글
날이 갈 수록 서로 닮아가시는 조조님과 신장님이로군요. ㅡㅡ;
Shaw 2009/07/05 03:29 #
어흠.
나츠메 2009/07/05 03:00 # 답글
에~이이이이잇, 나의 오다를 까지 마라.
Shaw 2009/07/05 03:29 #
오다♡
나츠메 2009/07/05 08:35 #
란마루도 이뻐해주셈.. 헉헉..
나유 2009/07/05 22:23 # 답글
저도 일단 에우메네스를 영웅으로 서술하자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지만, Shaw님이 본문에서 이야기 하신 부분을 보고 좀 이상해 느낌을 받기는 했습니다. 시점만 다르게 보면 참 이상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지요. (웃음)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인물을 바라볼수 있다니 즐겁습니다.
Shaw 2009/07/05 23:44 #
아무래도 혼란기에 활약했던 거물급이다보니, 이래저래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단인 2009/07/05 22:43 # 답글
으아아.. 후속 포스팅 너무 기대된다능~
Shaw 2009/07/05 23:44 #
썼다능.
별마 2009/08/17 16:43 # 삭제 답글
<히스토리에> 덕분에 에우메네스에 관심을 가지게 된 무리(?) 중 한 명입니다.플루타르코스의 시각을 잘 정리한,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에우메네스 글을 쓸 생각인데 주인장님의 글을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