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개전 원인에 대해서. 달려라 공화국




 


기원전 200년-기원전 196년의 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공화국은 필리포스 5세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동안 마케도니아의 패권 아래 있던 그리스에 "자유"를 선포했다. 이것은 그 전쟁의 전개 과정과 결과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의 그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무엇때문에 일어났던 것인가? 이에 관한 이야기는 분량 관계로 지난 글(http://shaw.egloos.com/3616013) 에서 생략하였으므로, 이번에 따로 소개하는 글을 만들까 한다.



우선 마케도니아는 당시에 로마의 영토나 보호령에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마케도니아와 로마 사이의 관계에서만 보면 침략한 것은 로마 공화국 쪽이 된다. 그런데 공화국이 개전을 결정한 기원전 200년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이 종결되고나서 불과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로마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인명, 재산상의 피해가 막대했다. 승전의 결과로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히스파니아 해안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바로 전쟁 피해가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기원전 200년은 당장 바다 건너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에는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해 초에 집정관이 마케도니아 공격안을 켄투리아회에 제출했을 때, 전쟁에 지쳐있던 시민단은 이를 부결시켜버렸다.[1] 집정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연설을 통해 시민들을 설득한 후에 이루어진 재투표에서야 비로소 찬성쪽의 표가 더 많이 나와, 마침내 전쟁이 결정될 수 있었다.

이처럼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아 처음에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도 전쟁안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결국에는 켄투리아회에서도 승인이 떨어졌다. 그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고대 역사가들이 거론한 원인들은 대강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필리포스 5세의 모습이 새겨진 주화.

 

첫째로 로마와 마케도니아는 사실 그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필리포스 왕은 2차 포에니 전쟁 도중에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일리리아의 로마 보호령을 공격했고, 이로 인해 '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뚜렷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로 종료되었기에, 로마인들에게 마케도니아에 대한 원한은 마치 덜 끝낸 계산처럼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2]

둘째로 기원전 201년을 전후한 시기에 로마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이던 지중해 동부의 나라들이 사절을 보내와서 마케도니아를 '손 봐줄 것' 을 요청했다.[
3]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영토 확장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이 당시 주변 여러 나라들을 침공하고 있었다. 이에 시달린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1와 로도스, 아테네, 아이톨리아 동맹은 저마다 로마에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지원을 호소했다.

셋째로 로마인들이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해서 느끼던 위협이 있었다. 즉, 로마인들은 필리포스가 혹시 한니발처럼 이탈리아를 침략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서 그리스에 군대를 보내 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


이상 세가지, 마케도니아에 대한 원한과 우호적인 그리스계 국가들의 요청,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필리포스의 이탈리아 침공에 대한 두려움이 로마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전쟁에 나서도록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전쟁은 앞서 어정쩡한 상태로 마무리되었던 1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연장전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일어나던 더 범위가 큰 경쟁의 맥락에서 보면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 확장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페르가몬 왕국이나 아테네, 로도스 등 중소 규모의 나라들이 지원군으로 로마를 끌어들여서 발생한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두가지 성격은 쉽게 서로 연결된다. 만약 로마측이 원래 마케도니아에 '풀어야 할 숙원'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리스인들도 그렇게 줄줄이 지원을 호소하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은 사실 매우 큰 맥락에 걸쳐져 있다. 헬레니즘 세계의 안정은 지중해 동부의 3대 강국인
마케도니아, 이집트, 셀레우코스 제국(시리아)의 세력 균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3강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부에서 여러 작은 나라들이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끝 무렵이 되면 그 균형이 깨지려는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고, 불과 5살의 어린 아들이 왕이 되어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한편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는 각각 야심찬 군주들인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가 국세를 키우고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중이었다.[5]

당시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는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분할하기로 밀약했다고 한다.[
6]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동부 지중해의 세력 균형은 크게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은 안티오코스 3세가 실제로 코일레 시리아를 침공하고, 필리포스는 에게해 장악에 나섬으로써 현실성이 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 규모의 나라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강대국은 서쪽의 로마 공화국 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개전에 앞서서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을 패사시킨 바로 그 사람) 를 비롯한 사절단을 이집트에 파견했고, 그 다음해에 이집트에서도 로마로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그리스에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약조함으로써(즉, 그리스 문제는 로마인들의 손에 넘긴다[!]) 사실상 로마는 광범위한 국제적 승인 하에 마케도니아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7]

한편 세번째로 언급한 필리포스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집정관 술피키우스 갈바가 재투표에 앞서 행한 연설에서도 발견된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잘못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결정하려는 것은 '전쟁이냐, 평화냐' 가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우리에게 그런 선택지를 남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는 지금 육지에서, 또 바다에서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유일한 문제는 이것입니다-마케도니아에 가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이탈리아에 앉아서 적을 기다릴것인가?"

여기에서 갈바는 마치 필리포스의 이탈리아 침공이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대중 선동인가? 아니면 무슨 근거가 있어서 내놓은 주장인가? 일단 당시에 그런 식의 첩보가 로마에 들어오기는 했던 모양인데, 정보의 사실성 자체는 불확실하다. 로마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리스인들이 날조한 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역시 확인 가능하지는 않다.[8]


그리고 또 하나, 로마 공화국의 내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원전 201년에 2차 포에니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고, 실질적인 승장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로마로 귀환했다. 그는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예로운 칭호와 함께 대중의 지지와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는 로마 과두정의 다른 구성원들을 자극시켜, 자신들도 스키피오와 같은 영예와 공적을 얻기 위한 새로운 전쟁을 희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9] 이는 대단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군국화된 사회였던 공화국에서 전쟁은 개인이 공적을 쌓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스키피오와는 적대적인 정파의 사람들에게는 그 필요성이 특히 강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 마케도니아 전쟁의 입안 과정에서 활약했던 사람들 가운데서는 기원전 200년도의 집정관으로 대중 연설과 재투표를 통해 마케도니아 전쟁안을 통과시킨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나,(공교롭게도 그는 1차 마케도니아 전쟁때 지휘를 맡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집트에 대사로 파견되어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하는 문제를 협의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그 예시인 듯 하다.[10






[1] Livy. 31.6
[2] Livy. 31.1., Just. 30.3.
[3] Livy. 31.2., Just. 30.3., Appian. Mac. 4., Polyb. 16.24.
[4] Liby. 31.3., Just. 30.3.
[5] 프리츠 하이켈하임 외,『로마사』(김덕수 역), 현대지성사(1999) p224-226
[6] Appian. Mac. 4.
[7] 클라우디우스 네로 일행의 이집트 방문은 Livy. 31.2. 이집트 사절단의 로마 방문은 31.9. 에 수록되어 있다.
[8] 허승일, 『로마사 입문-공화정편-』, 서울대학교출판부(1993) p63., 하이켈하임, 위 책 p227
[9] 신미숙, 「공화정기 로마의 제국주의」,『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1996) p377
[10]
H. H. Scullard, 『Roman politics, 220-150 B. C.』, Clarendon Press(1951) ch.5-6. 

 



덧글

  • 행인1 2011/04/03 21:27 # 답글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이것도 꽤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였군요. 원한, 두려움 등등에 마지막 토핑(?)으로 집정관의 공명심 추가.
  • Shaw 2011/04/03 22:39 #

    방어적 선제공격의 유명한 사례이기도 한데, 정말로 필리포스가 이탈리아 공격을 생각했었는지는 참 모를 일입니다.^^
  • ㅁㅁ 2011/04/03 21:53 # 삭제 답글

    그리스인의 자유는 뭐 후계자 때부터 맨날 쓰이는 구호 더군요. 뭐 안쓰는 애들이 없는듯
  • Shaw 2011/04/03 22:40 #

    그만큼 사람 낚는데 좋은 구호였던듯.
  • 들꽃향기 2011/04/03 23:0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당시의 지중해 세계의 전개 양상을 디아도코이 국가들이 다함께 약화된 그런 식으로만 파악했었는데, 실상은 3자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한개 국가가 국력이 약화됨에 따라 2개국가의 '담합(?)'으로 인해서 국제정세가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군요. ㄷㄷ

    사실 필리포스의 이탈리아 공격은 신빙성은 가지 않지만, 로마로서는 이러한 양자의 담합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 같네요. 이리저리 생각의 저변이 넓어지는 감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Shaw 2011/04/04 01:17 #

    사실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에 대해서 "유능하고 야심찬 군주들" 이라고 쓰려 했다가..... (석양을 향해 달리신 그분께 묵념을.)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나츠메 2011/04/04 00:54 # 답글

    1. 그리스인의 자유는 뭐 후계자 때부터 맨날 쓰이는 구호 더군요. 뭐 안쓰는 애들이 없는듯 (2)


    2. 민회(Comitia)에서의 투표라고 하셨는데, 로마공화국의 민회는 두 개 - Comitia tributa:부족회, Comitia centuriata:켄투리아회- 이므로 정확한 명칭을 표기하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양자 중 전자는 주로 내정에 관한 일을 처결하고, 후자는 전쟁과 외교, 주요 정무기관[집정관 등]을 선출하는 권능을 담당함.)

    ps: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국내 고대서양사 학계의 비판 중 하나가 바로 "민회에 대한 혼동"입니다. ㄳ
  • Shaw 2011/04/04 01:20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시오노 선생의 책은, 독자가 로마의 민회 시스템에 관해 오해하게 만들 수가 있지요. 위 글에서 민회는 켄투리아회로 고쳐두도록 하겠습니다.
  • 시무언 2011/04/04 02:51 # 삭제 답글

    "자유"는 그리스애들에겐 페르시아 전쟁때부터 계속 쓰이던 구호같군요. 한국에서 비슷한 위력을 가진 단어로는 "애국"쯤 되려나요... 미국 애들도 자유하면 껌벅 죽는것 같고.
  • 스카라드 2011/04/04 10:49 # 삭제 답글

    한니발이 홀로 고군분투했던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피해가 극심한 로마가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 해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영광과 신화가 넘치는 노제국 마케도니아에게 싸움을 걸다니,당시로서는 천지개벽할 뜨거운 화제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뻔할까나??


    개인적으로 구상하는 최고의 대결은 전성기 시대의 스파르타와로마 공화국의 전면전입니다. 로마도 스파르타를 쉽게 이기지는 못했을겁니다. 로마 공화국이 지중해를 호령한 시기에는 스파르타는 지리멸렬해진 상태이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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