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후예들 (17) - 스파르타의 몰락. 그리고... 달려라 공화국




각 세력 개략. 아이톨리아 동맹(붉은색)과 아카이아 동맹(초록색)은 2차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 로마와 연합했다. 스파르타
속령은 노란색으로 표시. 나비스는 한때 메세니아를 점령했으나 아카이아 동맹의 명장 필로포이멘에게 패배를 당해 물러났다.
(지도가 아직 정확하지 않으므로 수정 사항 지적을 바랍니다.)

 



라코니아의 유서깊은 도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에서 그 일면이 옅보이는 특이한 사회 체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꺾고 한때 그리스의 맹주로 군림하기도 했으나 그 패권은 30년 남짓만에 끝이 났고, 기원전 4세기 중엽 이후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의 세력 정도로 남게 되었다. 때로는 재기를 위한, 때로는 독자 생존을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는 노력들이 이어졌으나 그 중 어떤 것도 스파르타를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지는 못했고 그 과정에서 스파르타의 회복이나 세력 확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외부 세력, 특히 아카이아 동맹과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나비스 왕은 기원전 207년에 스파르타의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일부 노예(스파르타의 예농 계급인 "헤일로타이")를 해방하고 토지를 분배하는 등 일련의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는데,[1] 국력 신장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미처 장기적인 효과를 보기도 전에 더 커다란 세력들간의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2차 마케도니아 전쟁 중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의 중요한 도시인 아르고스의 지배권을 나비스에게 넘겨주었는데, 아마도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고스를 쉽게 차지한 후 나비스는 곧 로마에 접근하여 필리포스의 기대를 배신했다. 당시 로마 공화국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상태였고, "그리스 대의의 챔피언"[2]으로 명성높던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1세도 이 커다란 마케도니아 포위망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

나비스는 반(反) 마케도니아 연합에 600명의 크레타인 용병 부대를 보탰고, 아카이아 동맹과는 4달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아탈로스왕이 아르고스 문제를 제기했지만, 나비스는 아르고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보호를 요청해왔기에 도시를 접수한 것 뿐이라고 강변했다. 이에 아탈로스는 아르고스의 대표자들과 스파르타인의 감시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회견하여 진상을 들어야한다고 맞섰고, 나비스가 이를 거절하여 끝내 그 문제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나중으로 미루어졌다.[3]

나비스는 로마와 협상을 통해 지위와 영토를 승인 받은 것 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한시적인 상황에 불과했다. 스파르타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세력은 너무 많았다. 마케도니아가 정리된 후 기원전 195년에 "로마인과 친구들"은 아르고스 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특히 아카이아 동맹측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리스 해방"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 스파르타에 철권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되고 말았다.


본격_이것이_그리스의_자유




플라미니누스가 지휘하는 공화국 군대는 일단 아르고스 근처까지 이동하여 그 도시를 탈환할 것 같은 움직임을 취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바로 스파르타로 진격했다. 아카이아 동맹에서 보낸 1만명의 병력이 합류했고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함대에, 스파르타 출신의 불만 세력들도 합세하여 연합군의 세력은 5만에 이르렀던 반면에 여기에 맞선 나비스의 군사는 1만 수천 정도였다. 그는 일군의 병력을 보내 적의 후미에 기습을 가했으나 오히려 대패를 당하여 물러났고, 연합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스파르타 영토를 초토화시키며 진격했다.

마침내 중요한 항구 도시인
기테이온이 함락되자 나비스는 항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미니누스는 나비스가 아르고스뿐 아니라 연합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을 포기해야 하며 2척의 소형 배 이상의 함대를 가지지 말고 150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4] 그것은 상당히 가혹하다고 여겨졌으며, 스파르타인들은 이를 거부하여 전투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스파르타군은 다시 패해서 도시 안으로 도망쳤다. 나비스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방어에 임했지만 연합군이 스파르타를 포위하고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자 그것도 무너지고 말았다.

성벽이 점령당하고 적군이 스파르타 시내로 쏟아져 들어와 사실상 도시가 함락된 상황이 되자 나비스는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사위
피타고라스[5]가 성벽 가까이 있는 건물들에 불을 질렀고, 불길에 휩쓸릴까봐 두려워진 연합군 병사들이 퇴각하여 겨우 당장 함락되는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여전히 똑같았다. 결국 피타고라스가 플라미니누스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한 끝에 다시 협상이 이루어졌고, 지난번과 같은 조건으로 나비스는 항복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플라미니누스는 아르고스로 갔다.
"그곳 사람들은 다들 대단히 기뻐하고 있었다." 나비스가 위기에 몰리자 아르고스 주민들은 봉기하여 스파르타 수비대를 쫓아냈고, 지금은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였다. 굳이 아르고스를 공격할 것 없이 바로 스파르타로 갔던 플라미니누스의 전략이 맞아떨어졌던 셈이다.

아르고스인들은 플라미니누스를
네메아 경기 제전의 조직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아르고스 근방의 네메아에서 열리는 그 대회는 2년 전에 "그리스의 자유"가 선포된 이스트미아 경기 제전과 함께, 그리스 세계의 중요한 축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제 이 네메아 제전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의 자유"가 선언되었다.[6] 이번 자유는 지난번보다 더욱 완전한 자유였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억압받던 아르고스까지도 마침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왕 나비스. 영토확장주의 정책과 여러가지 개혁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가 지닌 힘은 외부
에서 닥쳐오는 커다란 도전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스파르타는 끝내 다시 주저앉고 만다.
폴리비오스나 리비우스 등 후세 역사가들은 나비스를 폭군으로 묘사했다.

 


다음해에 티투스 플라미니누스는 약속했던 대로 공화국 군대와 함께 그리스를 떠나 로마로 귀환했다. 그를 특히 만족하게 했던 것은 아카이아 동맹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이었다. 과거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포로로 잡은 공화국 병사 가운데는 그리스에 노예로 팔린 사람들이 많았다. 아카이아 동맹은 그러한 사람들 1200명을 찾아내어 몸값을 치르고, 플라미니누스에게 인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플라미니누스는 명성 높은 두 나라- 마케도니아와 스파르타를 패배시킨 영광과 함께 많은 전리품과, 또 질곡에서 해방된 동포들까지도 데리고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스는 해방되었다. 공화국은 그 강대함을 과시했다. 이제 더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스트미아와 네메아에서, 그리고 플라미니누스의 개선식때 벌어진 기쁨의 장관은, 어떤 면에서 모두 일종의 동상이몽 축제였다. 로마는 그리스에서  어느 한 나라가 특별히 독주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들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7] 그들은 그리스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아이톨리아인을 위해서 마케도니아를 멸망시켜주지도 않았고, 아카이아인을 위해 스파르타를 멸망시켜주지도 않았다. 이는 각각 두 동맹을 언짢게 만들었다. 또한 마케도니아와 스파르타는 상당한 영토와 돈을 빼앗겼고, 국가 위상의 추락을 경험했다. 어떤 나라는 조금 더 약해졌고, 어떤 나라는 조금 더 강해졌지만 어쨌건 로마는 이제 그들 모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게 확실했다.

말하자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리스의 자유"는, 뒤집어보면 모두의 불만을 살 수도 있는 기묘한 조치였다. 아이톨리아인들은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로마가 만들어놓고 간 "그리스의 자유" 상태를 뒤엎을 힘은 그리스의 어느 세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기원전 194년 시점에, 로마와 맞상대 할 수 있을만한 나라는 이제 지중해 세계에 딱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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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비스의 개혁에 대해서는 최자영, 「스파르타의 역사」,『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1996)를 참고.

[2]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는 대외적인 명성을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차전환, 「로마인들이 키벨레 신을 받아들인 이유」, 『서양고대사연구』 Vol. 19(2006) 참조.

[3] Livy. 32.39-40

[4] Livy. 34.35., 최자영, 위 글 참조.

[5] 피타고라스는 원래 아르고스의 수비를 맡고 있었지만, 스파르타 본국이 위험해지자 그곳 병력의 주력을 이끌고 돌아온 것 같다. 나중에 아르고스의 봉기가 성공하게 된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Livy. 34.40. 물론, 이 피타고라스는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6] Plut. Flam. 12.2

[7] 로마 수뇌부의 의도는 그리스에서 현상을 유지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이 생각한 "그리스의 자유"는 그리스인 스스로 현상을 파괴하거나 개변하는 것 까지는 허용하지 않는 "통제된 자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자유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로마와 그에 종속적인 동맹국들 사이에서 통용되어 오던 것이었다. 그리스는 로마인에 의해 마케도니아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집단적으로 공화국의 은혜를 입은 것이 되며, 이는 로마인의 관념에서는 그리스가 로마의 클리엔텔라(피보호관계)에 들어오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리스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외,『로마사』(김덕수 역), 현대지성사(1999) p233., 신미숙, 「공화정기 로마의 제국주의」,『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1996) p378., 김창성, 「맥락적 접근을 활용한 로마 제국주의의 이해 :로마 공화정 중기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제101집(2007) 참고.





덧글

  • 마무리불패신화 2011/04/10 21:34 # 답글

    주석을 보지 않았으면 피타고라스가 동명이인인줄 몰랐을 뻔했습니다.;;
  • Shaw 2011/04/10 23:50 #

    ^^
  • 마무리불패신화 2011/04/10 21:43 # 답글

    결국 로마가 내세운 자유는 그리스 본토의 세력 균형을 통한 대제국 견제일뿐..
  • Shaw 2011/04/11 00:13 #

    대체로 그랬겠지요. 그래도 그리스에서 자기가 좋은 일을 했다고 믿었던 것 같은 플라미니누스를 위해서 변명 아닌 변명을 시도해 보자면(^^;;;) 저 당시에 로마쪽의 친그리스주의자들이 가진 이상적인 그리스 상이 좀 보수적이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에 폴리스형 도시 국가는 이미 헬레니즘식 왕정국가나 세계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패배한 국가 형태가 되겠는데, 그런 것을 동시대의 로마인들이 고려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 쿠쿠 2011/04/10 22:20 # 답글

    현대의 서방이 타 지역에 원하는 구도가 정석적으로 펼쳐지는 모습이네요. 물론 핵무기의 시대에는 유지되기 힘든 전략이지만.
  • Shaw 2011/04/11 00:26 #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역 패권은 실추되었고, 공화국은 아드리아 해 너머에 버퍼를 가지게 된 셈이지요. 그런데 그 버퍼가 실제로는 별로 충실하지 않다는게 곧 밝혀지게 되겠지만...
  • 쿠쿠 2011/04/11 00:35 #

    이란의 압력은 사라지고 미국은 중동에 세력균형을 설계했지만 이라크도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으니...... ㅎㅎㅎ
  • 들꽃향기 2011/04/11 05:21 # 답글

    정작 '그리스의 자유'에 참가했던 스파르타 역시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공격대상이 되었군요. OYL

    결국 로마는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서로 견제를 하게 함으로서 최종적인 지역패권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카이아, 아이톨리아 동맹은 불만투성이었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조차도 그런 구도를 만드는데 공헌한 '결과'를 곧 느끼게 되겠지요. (....)
  • Shaw 2011/04/12 00:45 #

    아직 그래도 저때는 셀레우코스 제국이라도 있었는데... 대왕님께서 그렇게 한방에 훅가실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 행인1 2011/04/12 22:51 # 답글

    로마 공화국이 정말 저 일대에서의 '대전략'을 가졌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에 와서보면 정말 기묘하게 들어맞는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군요.
  • Shaw 2011/04/13 19:45 #

    처음부터 속주화가 목표였다고 하기에는, 걸린 시간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지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겠습니다.
  • 스카라드 2011/04/13 09:32 # 삭제 답글

    천하무적의 지중해 무쌍 스파르타가 허무하게 붕괴되는군요. 털썩....... 레오니다스 왕이 사후세계에서 탄식하겠습니다. 멍청한 그리스인들은 로마 공화국이라는 사나운 맹수에게 경험치를 넉넉히 축적하게 했습니다. 이제 10등급 마운틴 왕의 아바타를 볼 일만 남았군요.^^;
  • Shaw 2011/04/13 20:07 #

    그리스 세계는 이제 점차 확실하게 군사적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관심이 가는것이,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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