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군은 몇명이었는가? 달려라 공화국


 


기원전 204년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군대를 이끌고 적국 카르타고 세력의 본거지인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그것은 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여는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스키피오는 과연 얼마나 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가?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세가지 상이한 정보를 소개했다.(29.25)


(1) 보병 10,000명과 기병 2,200명. 총 12,200명.
(2) 보병 16,000명과 기병 1,600명. 총 17,600명.
(3) 보병과 기병을 합쳐 35,000명.


한편 그는 스키피오의 군단 하나가 보병 6,200명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되었다는 설명도 함께 제시했는데(29.24) 아피아노스는 (2)를 지지했다.(Appian.Pun.13)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해 온 것들과 비슷한 방법을 길잡이로 삼는다면 가장 먼저 우리는 스키피오가 아프리카에서 몇개의 군단을 데리고 있었는지부터 결정해야 할 것이다. 리비우스는 그 정보를 기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201년의 군단 총계와 병력 배치 상황으로부터 그것이 2개였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이 해에 군단수는 총 14개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출정군을 제외한 12개가 추적이 가능한 것이다.(30.41)

이를 토대로 생각할 때, (1)은 지나치게 적고 (3)는 많다. 군단 하나가 6,500명이었다는 것도 상궤 이상이다. 그렇다면 (2)가 정답인가? (2)는 2개 군단을 포함한 야전군의 통상적인 병력보다 적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미묘한 숫자에 무언가 근거가 있는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2)에는 무시하기 힘든 현실성이 있다. 아프리카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스키피오는 공화국의 인력을 모두 활용할 수는 없었다. 기원전 205년에 임지 시칠리아로 갈 때 7,000명의 자원병을 데려갔던것 외에는 특별히 이탈리아로부터 증원을 받았던 것 같지 않다. 2개 군단으로 된 1개군이 1만 7천여명이라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기묘하게 적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스키피오의 어려운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정도 병력만으로 작전이 가능한가? 우티카 인근에서 누미디아와 연합한 카르타고측 병력이 93,000명이었다는 등의 이야기(Polyb.14.1)는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으므로 검토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더 그럴듯한 정보가 전해지는 자마의 최후 결전에서, 마시니사는 6,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데려왔다고 한다.(Liv.30.29) (2)가 옳다면 이제 공화국측 군대 전체는 27,000명 상당이 된다.

하지만 기록상 같은 시간에 한니발에게는 40~50,000명이 있었던 것 같다. 폴리비오스는 그 전투의 결과 한니발군에서 20,000명이 전사하고 비슷한 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탈출한 자는 매우 적었다고 주장했다.(Polyb.15.14) 이는 필시 전체 병력이 40,000명 안팎이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한편 아피아노스는 한니발의 병력이 50,000명이라고 썼다.(Appian.Pun.40)

한니발의 보병은 세개 대열의 합으로, 그중 첫번째열은 리구리아와 갈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등에서 모집한 병사들로, 12,000명이었다고 한다.(Polyb.15.11)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이 대열은 아마 마고가 리구리아에서 데리고 있던 군대였을 것이며, 마고군에 관한 리비우스의 기술이나(28.46) 공화국이 6개군단으로 이를 막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이상하지 않다. 다른 두개의 열도 대략 비슷했을 것이라고 하면 한니발의 보병대는 36,000명선이 된다. 이는 그의 군대가 40~50,000명선이라는 정보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제 그러한 한니발의 군대와 비교하면 스키피오의 군대가 너무 작으며, 그 전투가 거의 대등한 병력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것 처럼 서술된 모든 기록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전황과 맞추려면 한니발의 병력에 관한 기록들을 과장으로 보거나, 위와같이 그래야할 이유가 별로 없다면 마땅히 스키피오의 병력을 더 높게 잡아야 할 것이다.

스키피오의 상황도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로 어려웠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칠리아에 병력이 넘칠 정도로 많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희소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곳에 기존에 있던 재건칸나이군은 기원전 209년에 4,300여명의 증원을 받았고 라이비누스가 항복한 누미디아 병사와 시칠리아 현지인을 합쳐서 형식상 2개군으로 만들었다.(http://shaw.egloos.com/3859103) 스키피오가 통상적인 수준의 야전군을 이끌고 가지 못했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앞서 물리쳤던 (1)은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있다. 보병 10,000명에 기병이 2,200명이라는 것은 비율이 이상하게 높다. 로마 공화국 군대에서 기병은 대개 보병의 10분의 1 가량이기 때문이다. 마치 보병 성분 가운데 일부가 누락된 것 같은 인상을 받으며, 여기서 기병의 수가 사실적이라고 인정하여 보병을 그 10배로 어림한다면 전체 병력은 24,200명으로, 대단히 안정적이고 평균적인 수준의 1개 원정군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왜 보병 가운데 상당수가 누락되었는가? 답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공화국 군대의 병력에 관한 기술에서는 시민 군단과 동맹국군, 또 보병과 기병을 각각 분리하여 열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병 10,000명이라는 것은 약 5,000명짜리 증강된 군단 두개에 해당된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Lazenby,p203] 그렇다면 이 자료의 전승 과정에서 동맹국 보병이 어떤 착오로 누락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위의 해석이 맞다면 (2)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 역시 어떤 누락의 결과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설명하기가 힘들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수치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스키피오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자원자들을 뺀, 시칠리아군 내에서 추출한 병력이 아닐까 하고 상상할 따름이다. 자원자 7,000명 가운데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10:1이라면 보병은 약 6,400명, 기병은 약 600명이 되며 여기에 시칠리아군으로부터 16,000명과 1,600명을 각각 더하면 보병 22,400에 기병 2,200이 된다.

스키피오가 보유했던 아프리카 원정군이 24,000명 가량이었다면 (3)은 자마의 최종 결전에서 마시니사의 누미디아군등 아프리카의 동맹군 11,600을 더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마에서의 공화국군에 대해 아피아노스는 보병이 23,000명, 기병이 1,500명이라고 했다. 이는 마치 스키피오의 군대가 원래 24,000명 선이었다는 추정을 방증해주는것 처럼 보이지만, 기병의 비율이 낮은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이는 그가 지지했던 (2)계열의 정보에 마시니사등 누미디아 동맹자들의 보병을 더한 수치일 가능성이 있으며
,[Brunt, p673] 따라서 (2)와 독립적인 자료라고 보기 어렵다.

군단 하나가 6,500명이었다는 주장은 다루기가 더욱 곤란하다. 스키피오가 이탈리아에서 데려간 자원자 가운데 시민과 동맹국민의 비율이 1:1이었다고 가정할때, 6,500명의 군단병이 나오기 위해서는 시칠리아군에서 9,500명의 시민병력을 추출해야 한다. 그러나 시칠리아군에는 군단이 두개밖에 없었으며, 이는 재건칸나이군단이었다. 그동안 증원받은 인원을 모두 합쳐야 겨우 그정도가 나왔을지 어떨지 의문스럽다. 스키피오가 재건칸나이군단의 병사들을 상당수 아프리카로 데려간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실제로 원정군이 떠난 후 시칠리아에는 3,000명이 증원되었다.(Liv.30.2)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는 병력 추출로 약화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원래 있던 군단 전부가 아프리카로 갔다고 할 수는 없다. 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재건칸나이군단에서 적합한 병사들을 선별한 것으로 기술했으며,(29.24) 이에 따라 시칠리아에 남게된 병사들은 원정군이 출정하는 날 항구에 와서 동료들을 전송했다고 한 것이다.(29.25)




<한니발(좌)와 스키피오(우)>




종합하면,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군에 관한 3가지 기록 중에는 그래도 17,600명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는 그 원정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할때 다소 적으며, 5,000명 상당의 군단 두개와 적절한 동맹국군이 결합된 24,000명 정도 1개군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 규모를 사실로 가정하고서 짧막하게 코멘트를 해 보자면, 이러하다. 리델 하트는 리비우스의 3가지 기록 모두 그 원정의 목표에 비추어볼 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p153] 그리고 그러한 소수의 병력만으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연합군을, 그리고 한니발을 이겼다는 것은 스키피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된다.

나는 그 주장에 역사성이 충분히 담겨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스키피오의 병력이 빈약했다는 판단은 필시 우티카 인근의 전투에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연합군이 93,000이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주는 인상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지상정으로 따지자면 여기서는 먼저 그 수치를 의심해야지, 1:5로 싸워 이긴 스키피오가 얼마나 굉장하냐고 말하기부터 해서는 안된다. 기원전 218년 전쟁이 발발했을때 최초 작전에 따라 공화국이 편성한 아프리카 침공군이 26,400명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정도로도 카르타고 본토 공격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는 방증이다. 스키피오의 병력이 24,000명 가량이었다면 여기에서 10%정도만 빠질 뿐이다. 작전을 완전히 바꾸어 2개군을 파견할 것이 아니라면, 그정도가 준수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스키피오 본인이 자신의 병력을 빈약하다고 여겼을지도 의문이다. 그는 과연 한니발과 직접 대결하게 되리라고 내다보았을까? 그 천재를 쓰러뜨려야만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다면, 사실 더없이 좋은 기회가 기원전 205년에 이미 있었다. 공화국 과두정의 계획은 한니발을 브루티움에서 포위하여 질식시키는 것이었고, 당해 집정관인 스키피오가 이 작전을 담당하게 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를 맡지 않고 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했던 것이다. 나는 스키피오가 내심 한니발과 대결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그가 없는 상태의 카르타고를 패배시키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천재와 맞서기 위한 대군을 준비해야 한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논외였을 가능성이 높다.






B.H.리델 하트 저, 박성식 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사이(2010)

*아피아노스는 다카마스라는 또다른 동맹자의 이름을 지적했다.(Appian.Pun.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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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th fear : 2차 포에니 전쟁기 로마 공화국의 병력은? (6) 2012-07-22 01:34:35 #

    ... 아프리카 원정군 외에 12개의 소재가 추적이 가능하므로, 결국 스키피오에게는 군단 2개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스키피오의 원정군 병력에 관해서는 http://shaw.egloos.com/3861784 에서.) 스페인군은 기원전 206년 말 경에 감축된 것 같은데(Liv.29.1), 기원전 201년에 다시 한번 감축되어 1개 군단이 되었다. 기 ... more

덧글

  • 2012/07/15 20: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15 20: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셔먼 2012/07/15 23:46 # 답글

    아무리 스키피오가 뛰어난 전술의 대가라고 할지라도 9만 명이 넘는 대군을 2만 4천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 Shaw 2012/07/15 23:42 #

    그렇습니다. 그 기록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행인1 2012/07/15 23:23 # 답글

    한니발 없는 카르타고 본국을 친다는 구상이었다면 소규모인 병력도 남득이 가는군요. 그렇게 안되어서 문제였지...(그래도 이겼으니까 상관없으려나?)
  • Shaw 2012/07/16 01:21 #

    한니발의 부재가 가정되었다면 당시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구상이었을 것이고, 부재 자체도 거의 확실했다고 생각합니다.
  • costzero 2012/07/16 01:00 # 답글

    기병까지 같으면 말의 건초까지 보급해야 하는데 전부 현지조달이었을리는 없고 4만에 가까운 병력에 그것도 50%이상이 기병이어도 충분히 해상 보급이 가능했나 보군요.

    최소한 한달은 넘는 전투기간이었을 텐데 원활하게 작전을 한걸 보면 대당전에서 10만 이상의 병력에 대한 해상수송 부분도 계산해 볼 수 있겠군요.

    거리상의 차이는 있어도 로마군 자료가 남았다면 대입해 볼 수 도 있겠군요.
    로마사를 이용해서 타문명의 전쟁양상도 유추해볼 수 있을지도...흥미가 생기는 군요.
  • Shaw 2012/07/16 02:01 #

    Liv.29.36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스키피오의 군대가 대량의 보급 수송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로마의 해상력은 주목할만 합니다. 일례로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출정 당시 40척의 전선과 400척의 수송선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시칠리아에 나와있던 전체 함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costzero 2012/07/16 22:39 #

    로마에서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튀니지?)까지의 해상수송방식을 생각해보면 산동의 덩조우에서 대련(비사성)이나 압록강하구,이미 점령한 평양의 능라도까지 보급거리가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닌데 당나라군이 계속 신라군한테 군량 보급을 의존한 걸 보면 고구려 수군이 해전에서 그렇게 활약한 기록이 없는데 인터셉트를 당한 건지...
    레이더도 없어서 그냥 관측해서 공격하는 방식인데 참 연구해볼 대상인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병력수송선만 만들고 군량 수송선은 안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혹시 출판도 하시나요?
    책으로 처음부터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 Shaw 2012/07/17 03:00 #

    그 문제는 제가 약간 이야기할수 있을 정도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1, 2차 포에니 전쟁 과정에서는 해상력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취미로 하는거라 공부가 천박해서, 출판할 수준은 아닌것 같습니다. ^^
  • 2012/07/17 03: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티베리우스 2012/07/16 19:31 # 답글

    글쎄요. 아무리 과장이라 하더라도 분명 초반 카르타고군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던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일단 전황만 봐도 스키피오가 초반에 카르타고군을 간단하게 격파한것도 아니잖습니까? 기병 규모의 기습, 약탈전이라던가 야습정도지 회전을 펼친것도 아니구요. 일단 기록은 기록이고, 그것을 교차 검증할만한 다른 기록이라던가 고고학 유물이 있는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로마군 수치를 높게 잡는다고 해도 스키피오가 대단하다는 점은 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리파에서 보여준 기동이나 야습 ( 특히 어둡고 지리에 밝지 않은데다 그 시대에 무전기가 있는것도 아닌데 수만 규모의 야습을 성공시켰으니 그 조직력은 대단히 높히 쳐줄만 하지 않을까요? ) 그리고 자마에서 보여준 코끼리 대처법등은 도저히 낮춰 볼수가 없더라구요. 다른것도 아니고 한니발을 정면에서 회전으로 격파하지 않았습니까?
  • Shaw 2012/07/17 02:55 #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스키피오는 어떤 현실적인 기준에서도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도 당연히 이는 일절 부정된 적이 없습니다. 신화적인 면에 있어 누그러진다고 해서 소위 '까는'것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지만, 뜻하시는 바를 제가 다 짐작할 수는 없어서 우선 짚어두려고 합니다.

    저는 고대 서양사에서 숫자 기록들은 적절한 것을 고를 다수의 선택지가 없어도 의심을 던져서 그럴듯한 추정치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록상의 개별적인 수치를 신뢰하기보다는 가급적 맥락상의 대세론에 따라 의심하자는 쪽입니다. 제게 특별히 일관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닌데, 서양사쪽 책을 보면서 현대 역사가들이 그런 면을 많이들 회의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이런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고대 자료의 저자들간에 주장이 충돌하는 일이 자주 있는데, 이런 경우는 사실 제일 타당해보이는 쪽을 고를수 있으므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기록의 존재는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 이미 전투의 규모라는 것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고 따라서 그럴듯한 수치 자료가 망실되고 엉터리같은 보고만 세전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것 같으므로 우티카 전투에서 의심스러운 점들도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미 쓸모없는 이야기가 길었는데, 여기서 굳이 더 지루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야습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제 시각에서 그것은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기 보다는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시팍스쪽 진지의 약점을 파악하게 되어 적절하게 찌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티베리우스 2012/07/18 02:00 #

    물론 정황상 의심이 가는건 사실입니다. 특히 누미디아군 규모가 너무 큰것도 그렇고.. 다만 어디까지나 정황상 추정이다 보니 아쉬울뿐입니다. 사실 고대사에 항상 잠적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죠.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추측으로 끝나는 일이 이번 경우만 있는게 아니죠.

    주인장분이 단순한 '까'종류이시라고는 설마...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번 경우는 제가 잘못된 쪽으로 말한듯합니다. 분명 주인장께서 스키피오의능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는데 제가 엉뚱하게 스키피오을 강조했네요.
  • Lautitia 2012/07/16 10:42 # 답글

    저는 요새 리비우스 번역을 결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_-;;; ㅋㅋㅋㅋ
  • costzero 2012/07/16 22:29 #

    번역은 영문서를 구입해서 하시는 건가요?
    존경스럽습니다.
    전 간단하 기술문서 조차도 귀찮아서 안하는데 도전해봐야 할 듯.
  • Shaw 2012/07/17 03:11 #

    아니, 키케로 서간은 언제 하시고.
  • Lautitia 2012/07/17 08:40 #

    아무래도 공화정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서 몇몇 책이나 읽고 뻥카나 치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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