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 제국의 몰락: 기원전200-196년. 달려라 공화국




진한 황색: 마케도니아 왕국
초록색: "쉼마키아" 동맹국

() 안은 이상화된 설정 시점.
'-' 이하는 그 이전 1년 동안의 전황.

※영역과 인구는 모두 대략적으로 추정된 것으로, 앞선 시리즈에 나왔던 해석과 가정들을 구체화하는 참고용 지표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원전 200년 가을 (로마군의 일리리아 상륙 직전).

-로도스군이 퀴클라데스 제도(+크레타 섬?)의 대부분을 휩쓸었으나, 필리포스는 트라키아-헬레스폰토스 원정을 단행하여 에게해의 북안을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기원전 203년 이래 필리포스가 벌인 일련의 영토 확장 전쟁은 로마의 원로원에 그리스 세계 개입의 명분을 제공해주게 된다.






기원전 199년 가을 (아이톨리아-아타마니아군의 패주 직후).

-일리리아, 다르다니아의 대부족들과 아타마니아 왕국, 아이톨리아 연방이 반(反) 마케도니아 연합에 가담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이 사방에 적을 두는 상황이 조성된다. 로마군은 에오르다이아 진입로에서 필리포스의 본대를 패배시키지만 보급 부족을 겪다가 돌아가고, 곧이어 필리포스는 테살리아에 침입한 아이톨리아-아타마니아군을 격파한다. 연합군 함대의 야심찬 칼키디케 공략은 실패로 끝난다.






기원전 198년 가을(*) (아카이아 연방의 배반 직후).

-필리포스는 에페이로스 북부로 이동한다. 요해지 아오이 스테나에 진을 친 왕의 본대는 로마군으로부터 닷사레티스 횡단로와 드린강 통로를 동시에 방호하나, 2달 남짓 자리를 고수한 끝에 끝내 패주한다. 에페이로스가 전열에서 탈락하고 아이톨리아-아타마니아군은 서남부 테살리아로 쏟아져 들어온다. 필리포스는 테살리아 중부를 초토화시켜 적군의 현지 보급을 차단한다. 로마군의 테살리아 진공은 아트라코스에서 저지된다. 그러나 가을까지 포키스와 동부 로크리스가 함몰되고, 아카이아 연방이 마케도니아를 배반, 로마와 손을 잡는다.






기원전 197년 가을 (템페 회담 직후)

-강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 필리포스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체결하지만, 곧 배신당한다. 보이오티아 연방이 기습을 당해 전열에서 탈락한다. 필리포스는 주력군을 이끌고 나아가나, 테살리아 중부의 구릉지대 "퀴노스케팔라이"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적군과 조우하여 결전한 끝에 대패를 당한다. 연합군 함대는 아카르나니아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펠로폰네소스에서는 아카이아군이, 카리아에서는 로도스군이 승리를 거둔다. 필리포스는 연합국들의 앞선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기원전 196년 가을 (강화 체결 이후)

-로마에서 결정된 강화 조건에 필리포스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이 마무리된다. 이스트미아 경기 대회에서 "그리스의 자유" 선언이 낭독된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대가 아시아 서부와 헬레스폰토스 일대를 경략하고 로마는 이에 대한 항의를 천명하여, 새로운 전란의 전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필리포스 5세가 본격적으로 "크레타 전쟁"에 뛰어들기 직전인 기원전 203년의 겨울 무렵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아마도 약 80,000평방km의 영토를 점했고, 120만명 안팎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았을 것이다. 선왕 안티고노스 도손 시절에 결성된, 마케도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기구(이른바 "쉼마키아")는 여전히 건재했고, 이 당시에는 마케도니아 외에 에페이로스, 아카이아, 보이오티아, 아카르나니아가 가입되어 있었다.(**) 또한 크레타 섬의 여러 도시도 필리포스를 자신들의 총재로 추대했다. 마케도니아 왕국과 그 보호국 성질을 띠었던 것 같은 이 동맹국들을 모두 합쳐 "마케도니아 제국"을 설정한다면, 그 영역과 인구는 115,000평방km, 210만명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 내의 국가들도 있었지만 그 세력은 "마케도니아 제국"과 비교하면 넓이에서는 20%, 인구로는 30%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전 202년 봄부터 기원전 200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필리포스는 에게해의 도서 지역과 트라키아, 아시아의 연안 지대에서 일련의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왕은 약 15,000평방km의 영토를 획득하고 25만명 정도의 신민을 새로 지배하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케도니아는 로도스 공화국과 페르가몬 왕국 등을 적으로 돌렸고, 기원전 200년 가을부터는 로마의 공격을 받게 된다.



흔히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후의 투쟁 과정에서 필리포스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과 직면했다. 한때 필리포스는 에게해의 최대 해상 세력임을 자처해도 될만한 규모의 함대를 운용하기도 했지만, "크레타 전쟁"을 치르면서 로도스-페르가몬 함대와 싸워 그 중 반수를 상실했다. 더구나 로마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반 마케도니아 연합 전선이 결성되자, 왕의 함대는 압도적인 약자가 되고 말았다.

이는 전황상의 큰 해독을 만들어냈음이 분명하다. 필리포스는 지상에서 여전히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수는 대체로 적 지상군을 능가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가 테살리아 남부, 에우보이아 섬, 펠로폰네소스, 아시아 등지에 분산 배치되었고, 왕 자신은 2만에서 2만 5천쯤 되는 주력군 하나만을 가지고서 곳곳에서 쳐들어오는 적들과 싸우느라 분투했다.


이런 현상은 어째서 발생했는가?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필리포스는 각지에 주둔군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대형 전함만 100척에 이르는 연합군 함대는, 마케도니아 및 그 동맹국의 해안 어디에나 방해받지 않고서 나타날 수 있었고, 합쳐서 4만명쯤 되는 인원을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노잡이이기는 했지만, 전투에 나설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특히 공성 준비에는 얼마든지 동원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마케도니아 제국의 해안 가운데 안전한 곳은 더이상 존재할 수가 없었다.

둘째로, 해상 자체가 적에게 제압되었기에 해로를 이용하여 병력을 이동시키고 재배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 따라서 일단 분산된 병력을 필요에 따라 재집결 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본토에서 먼 아시아에 나가 있던 군대에 대하여 그런 곤란이 발생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그쪽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 중-남부와 테살리아를 잇는 주요 교통로는 두개였다. 하나는 유명한 테르모퓔라이 협로를 통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우보이아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다. 둘 중 테르모퓔라이 협로는 기원전 3세기 중엽 이래 마케도니아의 숙적인 아이톨리아 연방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에우보이아를 경유하는 바닷길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그리스 경영"에 주로 활용되는 병참로가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199년 이래, 바로 이 통로 역시 적들의 해상 우세로 인해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동맹국을 "관리"하는데서도 난항을 겪었다. 이 전쟁에서 쉼마키아의 다른 가맹국들이 마케도니아를 돕기 위해 일으킨 군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병력 시리즈에서는 이 네 나라의 기여를 다 합쳐서 5,000명으로 가정했지만, 과연 그 정도나 나왔을지도 의심스럽다. 이들의 저조한 병력 기여가 꼭 의욕의 부족 때문은 아닐 것이다. 몇몇 국면에서는 마케도니아에 제법 물자 지원을 했을 수는 있고, 또 각국은 저마다 여러가지 다른 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아카이아는 바로 인접한 나라인 스파르타와 대립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쉼마키아 가입 지역의 자원과 인력을 마케도니아 왕이 충분히 끌어 쓸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리라는 관측을 하는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마케도니아를 적대하는 세력이 너무 많고, 강력했다는 점은 어찌 보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은 강대했지만, 로마제국은 그보다 더욱 강대했다. 反 마케도니아 연합 진영은 우세한 전력으로 마케도니아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공격을 가했다. 당장 전장에 나와 있는 군세도 군세이지만, 연합 진영은 잠재적인 전쟁 수행 능력에 있어서도 마케도니아보다 월등했고, 몇년간 전쟁을 계속한 것을 통해 의지도 충분히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필리포스는 기습과 험지 방어, 빠른 지상 기동 등 다양한 수단을 구사하며 1년 반 정도는 제국을 그럭저럭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일종의 소모전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 과연 마케도니아에 유리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왕은 아오이 스테나에서 일부 영토 할양도 감수할 용의가 되어 있음을 내비치며 강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적들의 자세가 여전히 강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당면한 적군보다 적은 군세로 교묘한 운용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 자체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군은 거의 20개월을 선전한 끝에 아오이 스테나에서 한번의 치명적인 실패를 했고, 이후 단 4개월여만에 "제국" 영역의 1/4과 근 80만의 구성원을 잃었다. 제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아직 대부분이 무사하여, 최소한 발칸 내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덩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단계에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패권은 종식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후 결전으로 가면서 연합 진영은 대단히 치밀한 준비 태세를 갖추었으며, 이로 인해 필리포스는 "outgeneral" (N. G. L. Hammond의 표현)당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 것 같다. 즉, 마케도니아는 단순히 수만 많은 범용한 적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197년 봄에 마케도니아군은 행군 경쟁에서 패배하여 장창 방진에 유리한 테살리아 남부의 평야 지대로 나아가는데 실패했고, 그곳의 보급 물자를 거두어 들이지 못했으며, 주둔군과 합류하지 못하여 병력에서도 큰 열세에 처했다.

필리포스는 파르살로스 인근의 평원으로 군대를 돌렸으나 보급 문제를 해결하느라 중간에 행군이 지체되었고, 그 결과 "퀴노스케팔라이"라고 불린 복잡한 구릉지대에서 적군에 따라잡혔다. 전투란 필경 도박이므로, 이 시점까지도 마케도니아의 패배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끝내 결과는, "이변 없음"이었다.



강화 조건에 대한 합의는 기원전 196년 봄 쯤에 이루어졌다. 전쟁중 잃은 것과 협약에 따라 포기하게 된 것을 제외하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최종적으로 약 50,000평방km의 영토와 50~60만명 가량의 신민을 소속시킨 나라로 축소되었다. 쉼마키아 동맹국들은 모두 배반, 탈락, 항복하여 마케도니아 "제국"이라고 불러볼만한 것은 소멸했다. "크레타 전쟁" 중에 마케도니아에 정복되었던 땅은, 빠르게 냉전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한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에서 분쟁의 싹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앞의 시리즈에서는 전황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난삽하게 이루어졌으므로, 비견으로 제시했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이 별도의 글로 만들어 보았다.









*기원전 198년 가을 이전에 필리포스는 뤼시마케이아(Polyb.18.4.6)와, 그리고 아마도 케르소네소스 반도를 포기했다.(Polyb.18.51.3) Walbank는 그 시점을 기원전 199년 겨울로 보았고,(Walbank P, p148) 나는 이에 동의한다.

**본문에서는 포키스와 동부 로크리스를 마케도니아 직할령으로 가정하였으나, 기원전 203년 당시 포키스는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었는지도 모른다. 동부 로크리스는 보이오티아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설정된 평방km당 인구 밀도는 다음과 같다. 에페이로스 12~20, 아카이아 35~50, 보이오티아 30~50, 아카르나니아 15~25, 아이톨리아 18~26, 아테나이 50, 아타마니아 10~15, 스파르타와 메세니아 20~30, 엘리스 30~50. 크레타 섬의 친 마케도니아적 지역의 주민은 합쳐서 5만명으로 가정되었다. 각 값은 Beloch가 제시한 것을 기반으로 하되 Bintliff가 정리한 헬레니즘기 발굴 조사 자료의 변동 양상을 반영하려 하였다. 본문을 구성할 때는 설정 범위의 중간값을 취하였다. 이 경우,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에는 기원전 200년 당시 총 300만명 정도가 거주했던 것이 된다. McEvedy-Jones의 계산보다는 약 20%높은 값으로, 지금 다루는 시대에 대하여 헬레니즘기의 인구 대감소를 인정치 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설정된 범위 내에서 최소치를 택한다면 비슷해질 것이다.

한편 고대 세계에서의 '그리스'란 모호한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마케도니아(proper)-에페이로스의 북쪽 경계 이남 발칸, 그리고 트라키아나 아시아, 이탈리아보다 이에 더 가까운 섬들 가운데 퀴클라데스와 크레타, 코르퀴라를 뺀 지역을 '그리스 '로 설정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구획일 뿐이다. 시리즈 중간에 등장했던 고대의 화자들은 마케도니아(proper)가 그리스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시각을 강하게 드러냈다.

※※기원전 198년 봄의 아오이 스테나 전역에서는 에페이로스 연방이 마케도니아군 보급의 상당 부분을 맡았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유사한 사례로 Polyb.5.1.11-12.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동맹국의 이러한 잠재적 역할을 다소 과장하는 것 같다. Plut:Flam.2.3.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병사를, 동맹 지역에서는 전비와 물자를 이끌어내는 것을 전쟁 수행의 기본으로 삼는 체제를 꼭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구체적인 정황이나 증거가 없으므로 본문에는 일절 반영하지 않았다.





N. G. L. Hammond & F. W. Walbank, "A history of Macedonia" vol.3 (1988).
F. W. Walbank, "Philip V of Macedon" (1940). (>Walbank P)
K. J. Beloch, "Die Bevölkerung der griechisch-römischen Welt" (1886).
J. Bintliff, "Regional Survey, Demography, and the Rise of Complex Societies in the Ancient Aegean: Core-Periphery, Neo-Malthusian, and Other Interpretive Models",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24 (1997).
C. McEvedy & R.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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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5/04/23 22:59 # 답글

    양 군대가 격돌하기 전에 반쯤은 이미 승부가 끝나버렸군요.-_-;;
  • Shaw 2015/04/24 17:38 #

    이 시리즈의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적절하게 짚어주신데 감사를.. ^^
  • cjfcm046 2015/07/05 22:48 # 삭제 답글

    이지도 좀 가져다 써도되겠습니까?
  • Shaw 2015/07/07 20:29 #

    어디에서 사용하시는지요?
  • 1234 2018/10/10 23:23 # 삭제 답글

    근데 마케도니아는 도대체 뭘 했길래 저렇게 적이 많았던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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